사연아이·발달· 부모 이야기
《형으로 자라, 아빠가 되어》#1. 나는 외동처럼 자랐지만, 외동은 아니었다
워니미니2026. 9. 21. 오후 02:47조회 100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전두리.
이상하게도 이 주소는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커가면서 이사를 참 많이 다녔다. 해외에서도 살았고, 그동안 거쳐 간 집들의 주소는 이제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곳이 많다.
그런데 어린 시절 살았던 이 작은 탄광촌의 주소만큼은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내 고향이다.
가끔 옛날 앨범을 꺼내 보며 그 시절을 떠올린 적은 있지만, 사실 한동안은 잊고 살았다.
내 기억 속 전두리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다. 부모님과 조부모님, 친척들까지 가까이 지내던 대가족의 공간이기도 했다.
내가 살던 시절에는 탄광산업이 한창이어서였는지 작은 동네치고는 사람이 많았다.
시장에도 사람들이 북적였고, 지금 생각하면 꽤 사람 냄새 나는 동네였다.
나는 거의 매일 밖에서 놀았다.
산으로 가고, 계곡에서 가재를 잡고, 집 앞의 넓은 밭에서 동네 형들과 친구들을 따라다녔다.
연탄 던지기 놀이도 하고, 쥐불놀이도 하고, 축구도 했다.
앞마당 흙바닥이나 동네 골목에서는 지금은 ‘오징어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 시절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했던 놀이들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때의 나는 그냥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깡촌의 개구쟁이 남자아이였다.
그리고 내게는 세 살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지금은 동생을 이야기할 때 ‘조금 특별한 동생’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겉으로 봐서 다른 것도 없었다. 그냥 나보다 말이 조금 적은 어린 남동생이라고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도 크게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놀러 다닐 때 동생도 곧잘 따라다녔다.
그냥 형과 동생이었다.
유치원을 지나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도 동생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나는 어른들에게 총명하다, 똑똑하다는 말을 곧잘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나와 동생이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도 당시 어른들은 흔히 그렇게 말했다.
“말이 조금 늦을 수도 있지.”
“저런 애들이 나중에 더 똑똑해져.”
그 말을 들으며 그냥 시간이 흘렀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부모님은 이미 무언가를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어떤 고민을 하셨는지는 어린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특히 어머니는 많이 힘드셨던 것 같다.
가족 안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고, 어머니가 온전히 동생만 바라보고 돌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우리 가족은 정들었던 시골을 떠나 강릉으로 이사했다.
내게 강릉은 엄청난 대도시였다.
시골에서 태어나 계속 그곳에서만 살았던 꼬마에게는 완전히 신세계였다.
처음 아파트라는 곳에서 살았다. 학교에 가보니 아이들은 옷도 잘 입는 것 같았고, 말투나 행동도 왠지 깍쟁이처럼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해주셨다.
전두리에 살 때부터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 학원을 다녔고, 좋은 운동화와 옷도 사주셨다.
집에는 피아노도 있었고 바이올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집이 꽤 잘살았나 싶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큰 사업을 하셨던 집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적어도 어린 내가 부족함을 느끼지는 않을 만큼 풍족하게 살았다.
강릉으로 이사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주판학원도 다니고 여러 학원을 다녔다.
부모님은 내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계속 만들어주셨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점점 자랐고, 동생도 자랐다.
그리고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어가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동생과 내가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사실이 내게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동생은 ‘오성학교’라는 곳에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자연스럽게 특수학교라고 부르겠지만, 당시 내가 정확히 어떤 표현을 썼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성학교에는 노란색 통학버스가 있었다. 정해진 곳으로 아이들을 태우러 오고, 학교가 끝나면 다시 내려주었다.
그 노란 버스는 내게 동생과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였다.
그 시절 아이들이 특별히 악해서였다고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지금보다 장애를 이야기하는 말들이 훨씬 거칠었다.
노란 버스가 지나가면 아무렇지도 않게
“야, 저기 병신들 타는 버스 간다.”
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친구들끼리 누군가를 놀리면서
“너 오성학교 가야 하는 거 아니냐?”
라는 말을 농담처럼 쓰기도 했다.
지금이라면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는 말들이 그때는 너무 쉽게 오갔다.
그런데 내 동생이 바로 그 버스를 타고 그 학교에 다녔다.
강릉에서도 내게 친구들이 생겼다.
학교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기도 했고, 동네 친구들과 노는 범위도 점점 넓어졌다.
어렸을 때는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면서 친구들과 하는 놀이가 달라지고 돌아다니는 곳이 많아지자 동생은 점점 우리를 따라오기 어려워했다.
친구가 묻기도 했다.
“야, 네 동생은 저기서 뭐 하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조금씩 불편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동생이 짐처럼 느껴졌다.
이 문장을 지금 쓰는 마음은 편하지 않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동생을 데리고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나 혼자 놀러 다녔다.
저녁 늦게까지 밖에서 뛰어놀 때도 나는 친구들과 있었고, 동생은 집에 있었던 것 같다.
어릴 때 전두리에서는 늘 함께 돌아다녔던 동생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동생을 집에 두고 혼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나도 어린아이였으니까.
그저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았고, 친구들 앞에서 동생 때문에 곤란해지고 싶지 않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동생이 있었지만 조금씩 외동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그때 집에 남아 있던 동생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나는 모른다.
부모님이 그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셨는지도 그때는 몰랐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게 조금 마음에 남는다.
아마 다음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될 것 같다.